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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진

스페인 시할머니 이야기




순간에 



구십오 세의 할머니가 산소 튜브와 링거병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병원 침대에서 

희미해져 가는 의식 앞에서 아무 생각 없었다, 사실 

의식은 이십오년 전에 한둘 씩 놓았다, 

끊임없이 잃어버린 그 의식으로 이제는 밥 먹는 것까지도 놓아버렸다, 

밥 먹는 방법을 몰라 그저 어머니의 배에서 

움틀 대는 태아와도 같았다, 존재 자체도 알 수 없는 그 미지의 영역 안에서 

유영하는 신비로움 그 자체가 되고 싶었다, 

구십오 세의 그 할머니는 말이다


아들이 할머니를 보살폈다, 가끔은 힘겨운 일상에 화가 났다, 

어느 순간 걷는 것도 잊고, 아니 잃고, 할머니는 그 가볍고 가벼운 무게를 

아들에게 지탱하게 했다, 그 환경에 아들은 화가 났다, 

결코 할머니에 화가 난 것은 아니다 


여기가 어딘가요? 할머니는 자주 물었다, 

여긴 어머님 집이에요, 

아들이 말하자 연신 고맙다며 대답하는 할머니, 일 초 전에 들은 말이 시원치 않아 연거푸 묻고 

또 묻는다, 알츠하이머병은 끝 모를 심연으로 할머니를 늙은 고아로 만들어 버렸다, 

내 서방님은 어디 있나요? 

서방님은 곧 오실 거에요, 라고 말한 지 수천 번, 

아들은 더는 참질 못했다, 아버님은 오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한동안 멍하던 할머니의 눈빛이 빛나는가 싶더니 다시 흐려진다, 

그럼 돌아오는 대로 날 좀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해주세요, 

평생 교육 받은 습관으로 할머니는 머리 숙여 인사한다, 칠십 세의 아들에게 


산소 공급기와 숨소리가 정적 속에서 조용히 울려댄다, 검은 밤 

희미한 조명이 복도 쪽에서 비춘다, 사방은 고요하기만 하다, 

이제 숨 쉬는 것도, 눈 뜨는 것도, 냄새 맡는 것도 기억할 수가 없다, 

근육도 기억을 멈추고 소화도 기억을 멈춘다, 이 순간 할머니는 무가 되어버렸다, 

있으나 이미 없는 존재가 되어 홀로 남겨진 이 세상, 기억 저편의 아득히 먼 

그 아득한 삶을 떠나 존재의 무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구십오 세로 

기억 없이 사는 것은 너무 외로운 일이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갈 새로운 사람을 위해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시간은 유유히 흐르고, 흐르는 대로 인간의 생과 사는 자연적 아날로그의 한 부분, 

어쩌면 할머니의 환생으로 새 아이가 태어날 지도 몰라, 

로맨스는 감정의 몫이다, 할머니는, 자연은, 그저 존재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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