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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시할머니 이야기

뮤즈 산들무지개 2016. 9. 17. 23:36




순간에 



구십오 세의 할머니가 산소 튜브와 링거병으로 

일주일을 보냈다, 병원 침대에서 

희미해져 가는 의식 앞에서 아무 생각 없었다, 사실 

의식은 이십오년 전에 한둘 씩 놓았다, 

끊임없이 잃어버린 그 의식으로 이제는 밥 먹는 것까지도 놓아버렸다, 

밥 먹는 방법을 몰라 그저 어머니의 배에서 

움틀 대는 태아와도 같았다, 존재 자체도 알 수 없는 그 미지의 영역 안에서 

유영하는 신비로움 그 자체가 되고 싶었다, 

구십오 세의 그 할머니는 말이다


아들이 할머니를 보살폈다, 가끔은 힘겨운 일상에 화가 났다, 

어느 순간 걷는 것도 잊고, 아니 잃고, 할머니는 그 가볍고 가벼운 무게를 

아들에게 지탱하게 했다, 그 환경에 아들은 화가 났다, 

결코 할머니에 화가 난 것은 아니다 


여기가 어딘가요? 할머니는 자주 물었다, 

여긴 어머님 집이에요, 

아들이 말하자 연신 고맙다며 대답하는 할머니, 일 초 전에 들은 말이 시원치 않아 연거푸 묻고 

또 묻는다, 알츠하이머병은 끝 모를 심연으로 할머니를 늙은 고아로 만들어 버렸다, 

내 서방님은 어디 있나요? 

서방님은 곧 오실 거에요, 라고 말한 지 수천 번, 

아들은 더는 참질 못했다, 아버님은 오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한동안 멍하던 할머니의 눈빛이 빛나는가 싶더니 다시 흐려진다, 

그럼 돌아오는 대로 날 좀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해주세요, 

평생 교육 받은 습관으로 할머니는 머리 숙여 인사한다, 칠십 세의 아들에게 


산소 공급기와 숨소리가 정적 속에서 조용히 울려댄다, 검은 밤 

희미한 조명이 복도 쪽에서 비춘다, 사방은 고요하기만 하다, 

이제 숨 쉬는 것도, 눈 뜨는 것도, 냄새 맡는 것도 기억할 수가 없다, 

근육도 기억을 멈추고 소화도 기억을 멈춘다, 이 순간 할머니는 무가 되어버렸다, 

있으나 이미 없는 존재가 되어 홀로 남겨진 이 세상, 기억 저편의 아득히 먼 

그 아득한 삶을 떠나 존재의 무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구십오 세로 

기억 없이 사는 것은 너무 외로운 일이니까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갈 새로운 사람을 위해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시간은 유유히 흐르고, 흐르는 대로 인간의 생과 사는 자연적 아날로그의 한 부분, 

어쩌면 할머니의 환생으로 새 아이가 태어날 지도 몰라, 

로맨스는 감정의 몫이다, 할머니는, 자연은, 그저 존재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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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 프로필사진 세레나 2016.12.13 00:31 바쁜 생활속에서 일부러 시읽기도 쉽지 않은데 뮤즈의 방에 오면 조용히 사색하듯이 커피와 쿠키를 즐기며 천천히 읽기 좋은거 같아요. 마지막 문장이 뇌리에 오래 머무네요.
    로맨스는 감정의 몫이다. 할머니도 자연도 존재했을 뿐이다..
    공유해 주셔서 감사해요 !!
  • 프로필사진 Mary 2016.12.21 12:28 참으로 아름답네요.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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